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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명’ 씌우지 마세요
댓글 : 0
조회수 : 25,613
2010-06-14 09:39:03
‘누명’ 씌우지 마세요

  추리소설의 여왕 애거사 크리스티의 작품 『누명』은 작가가
스 스로 뽑은 10대 작품 중 하나다. 어머니의 타살에 둘째 아들이 누명을 쓴 채 옥중 사망하는데, 2년 만에 아들의 결백이 입증된다. 사건 당시 외부의 침입은 없었고, 그렇다면 가족 중 한 명이 범인. 남은 가족은 커피의 쓴맛에도 서로를 의심하는 지경에 또 다른 살인까지 겪는다. 조금씩 알리바이가 드러나면서 실제 살인자는 극도의 공포에 떨게 된다. 등장인물의 ‘누명’은 추리소설에서 빠질 수 없는 장치인 셈이다.
 
  필자는 진료실에서 성 트러블 부부에게 어느 한쪽의 ‘누명’을 벗기는 탐정이 될 때가 제법 있다. K씨 부부의 사연도 이런 누명과 관련 있었다. “아내와 궁합이 맞지 않아요. 아무리 노력해도 별 느낌이 없고, 그래서 성행위가 어렵습니다.”

  30대 후반의 K씨는 사실 재혼남이다. 첫 결혼에서도 비슷한 문제로 미모의 아내와 헤어졌다. 모든 문제를 아내 탓이라며 타박만 했던 K씨. 삽입해 봤자 아내의 몸속은 별 자극이 없으니 발기를 유지할 수 없고 사정도 안 된다며 불평했다. 그 고집에 아내에게 요상한 시술까지 시켰지만 당연히 허사였다. 함께 병원에 가 보자는 아내의 권고를 거부한 채 결국 이혼.

  3년 후 K씨는 재혼했다. 새 아내를 선택한 데는 무엇보다 쉽게 흥분할 만큼의 상당한 미모와 건강을 가진 적극적인 여성이라는 점이 큰 이유가 됐다. 하지만 새 아내와 첫날밤부터 실패하고 말았다. 또다시 ‘궁합 타령’을 하며 모든 문제를 아내에게 투사했던 K씨. 아내의 끈질긴 설득에 마지못해 필자를 찾게 되었고 마침내 자신의 발기부전과 지루 문제를 받아들이고 치료하여 정상적인 성생활을 회복하였다.

  하지만 K씨의 문제는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첫 번째 아내에 대한 죄책감과 자책감에 심한 우울증을 겪게 된 K씨. 엉뚱한 ‘누명’을 씌웠던 그 과거를 사죄한다며 첫 번째 아내를 찾아 나섰지만 이미 그녀는 재혼해 단란한 가정을 꾸린 상태라 ‘있을 때 잘할 걸’이란 극도의 후회만 밀려왔다. 게다가 두 번째 아내에게도 수치심을 느껴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가 됐다. 다행히 K씨는 우울증과 성격 문제까지 필자의 치료를 받아 가면서 안정을 되찾았고, 지금은 재혼한 아내와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K씨 사례 외에도 부부 사이의 성 트러블에 엉뚱한 쪽이 누명을 쓰는 경우는 많다. 발기부전으로 찾아온 남성이 사실은 아내의 질경련증이나 극도의 성교통 때문에 성흥분과 발기반응을 잃었던 것으로 진단된 경우가 있는가 하면, 불감증을 치료하러 온 여성이 실제는 남편의 조루로 인해 충분한 성흥분 시간이 부족한 것이 문제였던 경우도 있다.

  성 트러블을 겪고 있는 부부들은 흔히 해당 문제가 상대방 탓이라는 오해를 하기 쉽다. 부부의 성문제에 무조건 어느 한쪽을 비방하고 잘 모르면서 상대에게 누명을 씌우는 것은 비겁한 짓이다. 이는 부부라는 ‘팀 의식’에 위배된다. 전문적인 성의학 지식 없이 ‘네 탓 내 탓’을 해 봤자 해법을 찾긴 힘들다.

  또 “모든 게 네 문제이니 너 혼자 가 고치고 오라”는 식보다 설령 한쪽 문제라 여겨지더라도 “우리 팀에 문제가 있으니 함께 고민하고 같이 노력하자”는 자세가 서로의 어깨를 가볍게 한다. 같은 팀으로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을 때 잘하라”는 말, 부부 사이에 명심해야 할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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